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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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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단계 : 북한군 남침(1950. 06.25 ~ 09.15)

  • 북한군은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섬멸 후 신속히 전과확대 및 추격작전을 실시하여 50일 이내 부산을 점령하고 전 한반도를 공산화 한다는 계획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시에 기습남침 개시
  • 6월 28일 한강교 조기 폭파 및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 함락
  • 미군의 한반도 증원과 7월 7일 유엔군 투입 결정
  • 7월 1일 미 지상군 최초로 미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부대 부산 도착 및 7월3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 4사단과 최초 교전
  • 8월초 유엔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일대에 방어선 구축 및 북한군 저지

북한군은 치밀한 침공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04:00시경 전차 1개 여단 및 1개 연대,
보병 10개 사단의 우세한 전투력으로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 남침을 강행하여 왔고,
당시 국군은 절대적으로 용감하게 싸웠으나, 남침 3일만에 서울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1950. 06. 25 새벽4시북한군 남침

  • 남한을 향해 85mm 곡사포로 공격 준비사격을 하는 북한군 포병 (1950.6.25)
  • 서울 시가에 진입하고 있는 북한군 (1950. 6. 28)
  •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포병지원을 받으며 조직적인 공격을 실시하였고, 국군은 제한된 병력, 부족한 장비로 육탄돌격 등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혈전을 벌였으나, 북한군에게 38도선 방어 진지를 돌파 당함
  • 북한군은 문산과 의정부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 남진을 계속하여 개전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서울 점령

1950. 06. 28 ~ 07. 03한강선 방어

  • 한강선 이남에서 방어하고 있는 국군 장병 (1950.6.29)
  • 한강선 이남에서 전방을 관측하고 있는 국군 (1950.6.29)
  • 한강 방어선을 시찰중인 맥아더 장군(1950.6.29)이때에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상륙작전을 구상함
  • 1950년 6월 28일 02:00시 북한군 선두가 미아리에 진입하면서 서울 북방 창동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하여, 02:30경에는 한강교를 폭파한 뒤 그날 새벽에 육본은 수원으로 이동하였고, 정오에는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강선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 07. 03UN군 참전

  • UN 안정보장이사회 참전 결의 모습
  • 오산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대전역에서 이동중인 스미스 특수부대 (1950. 7. 3)
  • 동경 맥아더사령부에서 미 육군 참모총장 몰린스 대장으로부터 UN기를 수여받는 맥아더 장군(1950. 7.7)
  • 「침략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 병력을 철수하라」는 1950년 6월 26일 UN결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6월 28일 UN은 「군사적 제재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한다」는 결의를 하였고, 이에 미국은 7월 3일 최초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전투에 투입하였으며, UN은 7월 7일 UN군사령부를 창설하였고, 7월 8일 맥아더 원수를 UN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전쟁기간중 UN군은 총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참전하였다.

1950. 08. 04 ~ 09. 15낙동강 방어작전

  • 흙먼지를 날리면서 전투병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는 GMC 트럭 (1950. 9. 2)
  • 왜관 서북방에서 B-29폭격기 99대가 융단폭격을 실시하고 있는 모습 (1950. 8. 16)
  • 낙동강에 방어를 하고 있는 국군, 한 병사는 지쳐있어 누워있다 (1950. 9)
  • 1950년 8월 1일~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방어선은 동·서부로 나누어 마산에서 왜곡에 이르는 서부 방어선에서 UN군을 배치하고 왜관에서 포항에 이르는 동부 방어선에는 한국군을 배치하였다. 북한군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피난민을 앞세워 공격을 감행하는 등 악랄한 행위를 자행하였으나, 국군 및 UN군은 「방어 아니면 죽음」이라는 투철한 정신력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