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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과 면회

  • 작성자최세영
  • 조회수3390
  • 등록일2007.08.02
화천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더 달려가서 내가 아들을 만난 곳은 상서면 산양리였다. 이곳은 일명 사방거리로 불린다. 사통팔달은 아닐지라도 이 지역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적성산 대성산, 백암산 부근의 중부지역전선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많고 다른 사단의 장병들도 사방거리로 나오기도 한다. 사방거리, 그 이름은 내게도 낯익다. 20여년이 흘렀지만 내 스무살 시절의 기억이 조각난 채 보관 된 폴더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전 날 밤잠을 설치고 새벽 3시경에 잠을 깼는데 아들 면회를 가는 설레임보다도 20여년의 세월 동안 그곳이 어떻게나 변했을까 하는 내 기대감이 더 컸다. 내 아들과 내 나이가 똑같았던 21살 시절 내가 군복무를 한 곳이 7사단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기막히지만, 내 아들도 내가 군복무를 했던 연대와 대대에 배치를 받아서 군복무를 하고 있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보니 전사자 유해발굴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아들이 한 달 간 매일 8시간씩 땅을 파는 삽질을 한다고 말하던 그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하는 놈에게 나는 노심초사하면서 당부를 하곤 했다. 유해발굴 참호를 파면서 실탄이나 포탄, 수류탄들이 나오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늘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했는데도 이 놈은 내 말을 가볍게 흘려듣는 것 같았다.
누구나 술을 한잔 하면 군대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대게 군복무 시절의 무용담이거나 그 곳으로 서서 오줌도 안 눈다는 말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남자들에겐 군 시절의 추억이 “고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고 다시는 그 곳과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바람이 숨겨져 있다. 그러면서도 술 한 잔 걸치면 솔솔 보따리를 풀어서 추억하는 곳이 군대 생활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부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내 군대 생활은 거의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소대장의 이름만 겨우 기억할 뿐이고 중대장이 육사 출신이고 키가 작은 나폴레옹 같은 인상만을 기억하는데 짧은 그의 앞머리 모양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이처럼 군대 생활의 내 기억이 조각난 것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의식적인 자기방어가 작동해서 그런다.
나는 GOP에서 사계청소 작업을 하다가 발목 지뢰를 밟았다. 그 때가 4월인지 5월인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다행히 나는 발목지뢰를 밟았지만 나뭇가지 덤불에 미끌려서 밟았기에 엄지발가락이 날아가지 않았다. 흔히 발목지뢰를 밟으면 발가락을 잃는다. 살사용으로 만들어진 지뢰가 아니라 생포용으로 만들어진 이 지뢰는 베트남 전쟁에서 정글 속의 월맹군을 잡기위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들여와 최전방 철책선 안에 대남 간첩을 잡기위해 뿌려졌다.
내가 이 발목 지뢰를 밟았을 때 흙폭풍이 내 몸을 치고 올라왔다. 흙더미와 나무숲 덤불에 쓰러진 나는 내 발목을 반사적으로 쳐다보았다. 군화가 그대로 내 발목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자 그때서야 내 의식이 제대로 돌아온 듯 발목이 끊어질듯 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 후 나는 춘천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내 오른쪽 발목의 뒤 아킬레스건 옆에는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다. 엄지발가락이 조금 덜 뒤집혀지고 발목이 덜 접혀져서 나는 다른이들 처럼 완전하게 쪼그려 앉지를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남자가 쪼그려 앉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큰 불편을 모르지만 간혹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내 자세는 엉거주춤한 모양새 그대로다.
정확히 말하자면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미슬미슬 안개처럼 덮어오는 기억. “내가 군대에서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내 발목이었고 얻은 것이 있다면 생명이었다” 라고 메모처럼 적었던 글귀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군대에서 내 아들 뿐 아니라 내 아들과 같은 젊은이들이 몸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부모들도 마찬가지 심정이고 부모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나는 후송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팔 다리를 잃은 젊은이들, 포탄에 총탄에 그리고 우연한 사고로 몸을 다친 많은 이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분단된 현실과 한국전쟁의 휴우증이 아직도 생생한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흔적은 내 몸에 40여 바늘의 수술자국으로 새겨졌다.
이제는 내가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다시 그 현실, 그 장소에 아직도 있다. 그리고 내 아들의 손으로 누구의 자식인지, 누구의 아버지인지 모를 한국전쟁의 전사자를 발굴하고 있다. 2구의 유해를 발굴했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들은 나의 큰삼촌이거나 젊은 아버지뻘쯤 되는 이들일테고 그리고 내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아버지이고 한평생 가슴에 아들을 묻고 살아온 어느 낯모르는 어머니의 아들일 것이다. 그들의 유해 옆에선 아직도 전쟁의 증거처럼, 선명한 영문자가 그대로인 미국산 우유 파우더 봉지가 나오고 녹슨 M1소총의 탄피가 나온다. 가끔 불발된 수류탄도 나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딘가에 숨어있는 불길하고 불행한 그림자가 덮쳐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불길한 그림자에 손을 대지 말라는 당부만 할 뿐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의 그림자가 그에게 닿지 않기를 내심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보니 조금 태연하게 듣는 아들을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랴, 1박2일의 소중한 외박을 나온 놈의 기분을 망치게 할 수 없어 내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유해발굴 작업이 마지막 일주일 남았다고 했다. 나는 내 아들과 같은 7사단 장병들의 안전무사를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 그들의 손으로 발굴되는 이들이 외롭지 않은 영혼이 되기를 바랐다. 오랜 시간 어둠의 땅 속 깊이 침묵으로 묻혔던 그들이 젊은 장병들의 손에 발굴될 때 주변의 나무 풀들이 모두 고개 숙이며 그들을 위로해주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신선한 골수를 얻은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몸을 씻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으로 형제들의 품으로 그 가족과 친지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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