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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 인천송도고 2학년 이장희

  • 작성자이장희
  • 조회수3222
  • 등록일2011.06.30
조국에 바친 귀중한 생명들이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

인천송도고등학교 2학년 12반 20번 이름 : 이 장 희

후덥지근한 더위가 온 몸을 칭칭 감고 찌는 듯한 태양이 아스팔트 도로를 녹일 듯한 6월이다. 우리는 의례적으로 6월이 되면 호국보훈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라사랑 포스터그리기 또는 글짓기 대회와 함께 한 달을 열면 잠시 뒤 기말고사와 함께 6월을 보내는 것이 그 간 나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하지만 올해 6월은 내겐 조금 남달랐다. 재향군인회에서 주최하는 호국보훈안보체험학습을 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다녀오게 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각과 제 3땅굴 및 도라산전망대를 돌아보는 호국보훈체험학습으로 인천시내 초등학교 몇 개교와 함께 진행하는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부탁을 하여 토요휴업일을 활용하여 다녀왔다. 평소 내 머릿속에는 군대라고 하면 연예인들의 기피현상 혹은 유명연예인의 군대입대소식 혹은 군인들의 구타 정도의 이슈들만이 떠오르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호국보훈안보체험견학을 통해 내 머 안의 안 좋은 기억은 한 방에 날려 버리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6월 5일 토요일 햇볕이 쨍쨍한 날 재향군인회 아저씨와 초등학생들 약 75명과 함께 버스에 오른 나는 머쓱하고 왠지 창피하기도 하였다. 곧 이어 재향군인회 아저씨께서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 6.25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가 얼마나 되는 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전혀 감이 오지 않아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나를 지적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인천의 인구가 약 200만이니까 병사들의 수는 많아봤자 기껏해야 5만 명 정도 되지 않을까? 라는 직감으로 말씀 드렸다가 망신만 당했다.
고등학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면박을 주시던 아저씨가 처음에는 미웠지만 잠시 뒤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내 무지와 무관심에 대하여 부끄러웠다. 2011년 지금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나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름 없는 대한민국의 온 산하에 묻혀있는 호국용사가 13만 명이나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중에는 학도호국단으로 출정하여 나라를 구한다는 애국심 하나로 그 어떤 무기나 병술도 익히지 못한 채 젊음을 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전쟁 속에서 부하를 구하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 군인아저씨의 이야기, 갑자기 들이닥친 북쪽 무장공비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소년병들의 이야기 등등.
한동안 나와 버스 안에서는 정적이 흘렀고, 이런 이야기로 애국심을 불태우는 순간 버스는 벌써 도라산전망대 진입을 위한 헌병 초소를 지나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통일촌 마을은 그야말로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가슴을 옭아매는 듯한 쇠사슬과 해골모양의 안내 표시깃발을 군데군데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6.25 당시 묻어 놓은 지뢰들로 인해 현재까지도 많은 병사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6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앙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라전망대에서는 약 10분 동안 군인의 설명과 안내를 들었다. 도라전망대는 DMZ안에 위치한 전망대로 남한에서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개성의 송학산, 김일성 동상, 기정동, 개성공단 등을 육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운 좋게도 날씨가 좋아서 건물의 뒤편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북한 지역의 마을들을 볼 수 있었다. 6.25 전쟁 이전에는 우리 땅이었을 그 곳을 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땅을 지켜만 봐야한다는 한스러움과 함께 장차 우리들이 이뤄내야 할 과제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가슴시린 아픔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으려니 벌써 버스에 오르라는 신호가 들렸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고 잠시 뒤 날 실은 버스는 제 3땅굴에 이르렀다. 제 3땅굴은 아치형의 대규모 땅굴로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이며 남방 한계선까지 거리는 435m밖에 되지 않고, 서울까지는 불과 44km 거리에 있어 빠르게 들어 올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고 두려웠다. 전술능력으로 보면 시간당 무장병력을 3만 명 통과시킬 수 있으며 무장한 탱크도 이동이 가능하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등골이 오싹하였다. 북한은 남한에서 뚫은 것이라고 억지를 쓰기도 하였는데 내부 갱도의 폭파흔적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북한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것은 6.25 사진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 학도병이 남긴 편지와 유품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안부를 걱정하면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사랑과 눈물로 적어 내려간 낡은 편지와 나이 어린 병사의 이름과 군번이 적힌 작은 목걸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한 사진에는 흙탕길에 무엇인지 모를 검은 물체들이 쓰레기처럼 널부러져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피난길을 떠난 피난민들의 즐비한 시체였다. 마치 도로 옆의 무수한 가로수 잎들처럼 나뒹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사람 썩는 냄새가 나는 듯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냥 막대기에 사람을 붙잡아 놓고 양궁의 과녁판처럼 무수한 양민을 학살하는 사진을 마주한 순간 피비린내가 확 풍겨오는 통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민족의 아픔을 담고 있는 이런 사진을 보는 것조차도 두려운 내가 만약 지금 시점에서 전쟁을 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진호 전투현장의 중공군 인해전술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하얀 도화지에 무수히 많았던 까만 점같은 모습이 중공군의 모습이었다. 군복을 걸치기는 했으나 초등학생처럼 앳된 소년들이 바로 우리조국을 구해낸 것이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 주먹만한 머리에 한없이 커 보이는 군모를 헐렁하게 쓰고 우리 조국을 지키고 일궈낸 호국영령들의 감사함에 실로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가슴 아픈 흑백의 사진 다음에는 컬러로 선명한 사진들이 즐비하였다. 하지만 차라리 흑백 사진이 나을 뻔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11년 현재 우리 조국에서 발견한 6.25전사자들의 유해 발굴현장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기술의 발달과 디지털 세상이 미울 정도로 그 곳 사진에서는 끔찍한 것들이 보였다. 작은 붓으로 흙더미를 살살 긁어내자 수많은 사람의 뼈가 나왔다. 그 사체는 어린 아이에서 성인, 남녀 모두의 것이었다. 군화와 함께 흙더미 속에서 60년을 기다린 그 세월동안 얼마나 억울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뿐인가? 유해 발굴 도중 폭발물도 함께 감지되어 애궂은 인명을 잃는 참사가 생기는가하면 죽어서도 한이 맺힐 정도로 폭발물을 함께 매장한 그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그 날은 섭씨 30도가 웃도는 날이었지만 나는 등골이 오싹하고 그들의 잔악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던 날로 기억이 된다. 이런 슬픔과 한스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할까? 실로 고민이 된다. 아직까지도 많은 실향민들은 임진각을 찾아 고향을 향해 절을 하는 향로와 망배탑을 보면서 우리들의 소원은 진정 통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 임진각에서 끊긴 경의선 철도는 잡초 속에 옛 증기기관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을 달고 있어 보는 이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북녘 땅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을 애타게 그리는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한 해답을 임진각 관광지 내 3만 평의 광활한 언덕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이곳은 통일과 평화의 상징인 평화누리공원으로 육군 제1사단 근무 중 공로를 세운 장병들의 정신을 기리고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다. 6.25 전쟁을 보도하기 위해 종군했다가 순직한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를 포함, 미국과 프랑스, 영국, 필리핀 등 국내외 18명의 종군기자를 기리기 위한 순직종군기자추념비와 6.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개성의 송악산 전투에서 폭탄을 지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10인의 용사의 거룩한 정신을 담은 육탄십용사 충용탑이 눈에 띄었다. 유격전을 펼치다가 희생된 용사들을 추모하는 개마고원 방공유격대 위령탑 등에서 나는 해답을 찾은 것이다.
이 나라를 끝까지 지키기 위한 호국영령들께 묵념으로 감사함을 표하는 것 외에 내 조국은 반드시 내가 지킨다는 굳은 각오와 의지만이 이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북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놓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조국에 바친 귀중한 생명들이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우리가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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