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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눈감지 못한 전우여, 이제 편히 쉬소서.

  • 작성자이성철
  • 조회수3180
  • 등록일2011.09.01
<눈감지 못한 전우여, 이제 편히 쉬소서>
-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3학년 이성철

우리나라에서 전쟁의 끝난지 어느덧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6.25의 아픔은 상존해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조국 수호강산을 지켜낸 호국영령들의 유해들은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6월 28일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주관 및 국정원 후원으로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초청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에 우리 학과가 초청되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살펴보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행사를 참가하였다.

28일 아침 3호선 양재역에서 집결하여 참가한 단체별로 버스를 나누어 타고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행사가 열리는 당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아침햇살이 출발하는 우리들을 화사하게 비추었다. 호국영령들이 우리들의 방문을 반가이 맞이해주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유해발굴 감식단 관계자분의 말씀을 들으며 감식단에서 추진하는 사업 전반에 관한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유해발굴사업이 무엇인지, 사업추진 절차와 지금까지의 발굴결과와 앞으로의 발굴계획, 전사자 유가족을 찾는 동영상을 보면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유해발굴 감식 업무에 대해 하나둘 배웠다. 전쟁직후 먹고살기 위한 생존투쟁에 바빠 뒤늦게 시작한 유해발굴과 이로 인한 어려움을 설명할 때에는 아쉬움의 탄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분의 유해를 찾을 때까지 이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대목에서는 힘찬 박수가 나왔다.
홍보 동영상을 시청하고, 여러 가지 질문 및 답변을 하다 보니 어느덧 강원도에 도착하였다.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강원도의 푸른 강과 산들을 보면서 우리는 양구에 위치한 백두산부대에 위치한 제 4땅굴을 도착하였다. 북한이 남침을 위해 판 땅굴 중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4개로 가장 뒤늦게 발견된 것이 제 4땅굴이다. 지상으로의 간첩침투 및 공격이 한계에 이르자 북한에서는 새로운 침투방법을 모색하였다.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공략을 위해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 통로라니 설명을 듣는 내내 어이가 없으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땅굴 입구에는 충견의 동상과 묘지가 있다. 지뢰 탐지견으로서 땅굴 정찰시 가장 앞에서 지뢰를 탐지하던 이 개는 지뢰를 밟게 되자 훈련 받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 군인들을 대피한 후, 산화하였다. 이러한 개를 위해 소위로 추서하여 묘지와 동상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땅굴 발견 후 우리 국군이 시추한 역 갱도를 통해 약 200m정도 걸어가자 북한군이 파고들어온 땅굴과 맞닥뜨렸다. 여기에 우리 국군이 내부관람용 전동차를 타고 100m정도 북으로 향하였다. 지하 속에서 북으로 가는 전동차를 탄다는 것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북으로 간다는 말에 섬뜩하였다. 넓어진 내부에서 전동차는 멈추었고 그곳에서 땅굴 내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일정한 너비와 높이의 땅굴을 직접 들어가서 보고나자 북한이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과 ‘아직 이 땅굴이 발견되지 못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라는 끔찍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한 땅굴이 또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생겼다.

군부대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1시간 정도 수리봉을 함께 걸어 올라갔다. 이곳은 피의 능선이라고 부르는데, 전투 당시 능선에 피가 흘러내릴 정도여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얼마나 전쟁이 치열했는지를 그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리봉 정상에서 이용석 조사과장님이 열렬한 박수와 받으시며 나오셨다. 조사과장님은 유해발굴을 처음으로 시작하신 분으로 10년 이상의 유해발굴 현장을 몸소 다니시면서 지휘하신 우리나라 유해발굴의 살아있는 산 증인이시다. 발굴현장 진입에 앞서 묵념을 하고 조사관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경험담들을 들을 때는 나도 한마음이 되어 유해발굴 현장에 있는 것같은 긴장감까지 들었다. 설명을 들은 후 직접 발굴된 유골 및 여러 전쟁도구들을 보았다. 녹슬어있는 탄피, 수통, 대검들은 그 당시 전쟁의 현장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그러한 물품들을 보고 난 후 실제 발굴 현장으로 향하였다. 유해발굴병과 인근 군부대 장병들이 힘을 합하여 발굴이 한창 이였다. 발굴된 유골을 보게 되자 분위기는 엄숙해지고 모두들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하였다. 포탄과 함께 발견된 유골은 그의 숭고했던 죽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저 멀리 떨어져 발견된 일부 뼈는 포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한 그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약 60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얼마나 쓸쓸히 계셨을까.’, ‘우리의 손길을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이 분들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혹은 소중한 아들이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라갔던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벼워야 했으나, 마음은 쇠뭉치처럼 무거웠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뒤로하고 인근 부대에 마련된 임시 봉안소에서 헌화 및 분향을 하면서 행사를 마쳤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인 6월 25일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단 몇 분이라도 나라를 위한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였는가. ‘국가 안보는 한순간에도 쉴 틈이 없다고 약 2년간 몸소 느끼고 왔는데도 다시 내 주변의 것에만 보는 내 행동에 부끄러웠다.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분들의 순고한 희생으로 안녕과 평화를 대신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은 잊은 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이분들이 편하게 쉬도록 해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분들이 지킨 자유를 통해 우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살아가고 있다. 그 때 그 당시 수많은 전사자들의 유골은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아직도 생사를 몰라 애타게 기다리시는 부모형제의 품으로 모시는 유해발굴사업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호국의 얼을 잇는 임무이다. 과거는 미래의 살아있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올바른 국가관과 사회정체성 확립은 올바른 과거 정립을 토대로 한다. 유해발굴사업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유가족과 목격자들이 줄어들며, 국토의 경제개발로 발견 가능성이 줄어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만이 우리 후손들의 도리이며 이 분들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우이다.
“유해발굴사업에서 하면서 유해가 가족 품에 돌아갔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며 마지막 한분까지 찾아서 가족의 품에 돌려 드릴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국방부 유해발굴 조사단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소중한 사실을 깨우치게 해준 이번 현장에 초대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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