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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 인천진산초 6-4 신소희

  • 작성자구민정
  • 조회수3112
  • 등록일2011.06.20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

인천진산초등학교
6학년 4반 신소희
tlsthgml1495@naver.com

지난 6월 1일에 유품전시관으로 가서 유품을 관찰했는데 무언가를 봤다. 그런데 머리뼈에 총상이 2개나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전사자의 시계가 멈춰있는 사진도 있었고 미군 뼈조각도 있었다. 6.25전쟁 때에는 미군이 도와준 것 같다. 군번줄은 아주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내가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방송된 드라마 전우라는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팔이 짤리고 총을 맞은 사람도 있었다. 전우드라마에서는 북한군, 미군, 남한군 등의 이야기가 잘 있었다. 남한군의 군번줄도 보았다. 은색 목걸이였다. 전우를 볼 때는 처음에 호감으로 보았지만 6.25전쟁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보았다. 그런데 서서히 동료를 잃어버리는 아픔과 슬픔이 담겨있었다. 전우라는 드라마가 동료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북한군이 패배하고 물러가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날 새벽에 북한군이 중국군을 대리고 와서 바로 전투를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이 희생하고 아픔을 느끼면서 남한군은 더더욱 힘내야한다는 생각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의 수가 너무너무 많았다.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넋을 위로하고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이라는 사업도 있었다. 여러 가지 분류를 거쳐서 부모님, 아들 등등을 찾아내는 데에는 좋았다. 그리고 건강검진과 여러 검사도 공짜로 해준다고 하였다 미국군의 유해를 찾아서 조사를 한 다음에 가족들을 모시고 같이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일단은 발굴준비, 발굴/수습, 신원확인을 위한 감식, 후속조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별 국군전사자 발굴유해를 보면 4,698구라고나와 있다. 발굴은 소중한 것 같았다. 군번줄로 확인한다고 하였다. 일단은 군번줄을 앞니에다가 끼고 동료한명이 발로 차서 군번줄을 삼키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 담임선생님의 할아버지도 6.25참전병사라고 하신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신 전사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에 유해발굴작업을 더욱 촉진시키겠다고 하였다. 언제나 이 아픔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전투현장이 훼손된 것은 급격한 국토개발로 인해 없어졌다고 본다. 6.25세대 고령화분들의 내용을 듣고 전사자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한다고 하였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우리나라 전사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국립현충원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되어있는지 어떤 식으로 모시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이 처음에 유품전시관에 가기 전에 어떤 동영상을 보여주셨는데 그거보고 울 뻔하였다. 왜냐하면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기적이라서 아무 것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로 전사자들의 동료의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전우드라마를 봤을 때 마지막화 때 동료가 없는데 환상으로 동료들이 보였다. 전우에서 그 팀원들은 북한군으로 가서 뭔가를 하였다 그런데 어떤 남한군은 북한군의 옷을 입고 북한군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배신하는 동료들도 많았을 것 같다. 전우에서는 6.25전쟁의 아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6.25전쟁이 지난 것도 어느새 6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내가1950년대에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조국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전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 우리나라 전사자들 덕분에 좋은 나라가 발전되었다. 어떤 편지를 보니까 아주 슬픈 말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의 내용은 이렇다. 너무 슬픈 말이 담겨져 있었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자랑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해 본 적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렇게 했다. 살던 나라에 젊음을 받아달라고 하였고 내가 적을 막다 쓰러짐은 후배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함이니 후회는 없다고 하였다. 하루 빨리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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